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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조총 등 총포를 제작했던 화기도감 터

by 일상행복 주식회사 2025.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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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기도감은 조선시대에 총포를 제작했던 곳입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조총을 사용하는 바람에 아군이 크게 고전했는데, 이에 대항하기 위해 조총청을 만들어 총포를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북쪽의 여진을 방어하기 위해 총포 제작에 전념하기 위해 조총청을 화기도감으로 개편한 것입니다.
 
삼청동 한국금융연수원 입구 북쪽에는 화기도감 터라고 적힌 표지석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조총 등 총포를 제작했던 곳이라고 하는데 자세히 알아봤습니다.
 

한국금융연수원 입구 당방 밖에 있는 화기도감 터 표지석
 
한국금융연수원은 금융기관 임직원의 자질향상을 통해 금융산업 발전을 기여하기 위해 1976년에 창원했습니다.
금융기관 임직원들을 교육하고, 자격의 관리 및 운영과 금융전문도서 출판 등의 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곳으로 처음부터 삼청동 이곳에서 시작했습니다.
 
사원 기관으로는 시중은행과 특수은행, 지방은행, 인터넷은행 등 모두 22개 은행이라고 합니다.
 
삼청동 구내식당, 한국금융연수원 구내식당

  
조선시대 화기도감은 임진왜란 후 일본식 조총의 위력을 뼈저리게 느낀 뒤, 조선에서도 조총을 본격적으로 만들려고 조총청을 설립했습니다.
1614년(광해군 6년)에는 후금과 일본을 의식해 이 조총청을 확대, 개편해서 화기도감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화기도감은 병조 소속의 군기(무기) 제조 기관으로 조총, 대포 같은 총포와 화약과 탄환 생산에 집중한 곳이었습니다.
화기도감엔 도제조 1인(영의정이 겸임), 제조 5인(정2품), 도청 1인, 낭청 좌우 2인씩으로 운영되었습니다.

화기도감의궤에는 불랑기포, 현자총, 백자총, 삼안총, 소승자장가, 쾌창 등 수많은 화포를 만들었고, 그 과정의 공정과 인력 재료까지 기록되어 있는데요.
이렇게 생산된 무기는 비변사의 방어계획과 화기수급 계획에 따라 각 진영으로 이송되었습니다.

 
화기도감은 1615년 4월 29일 1차 업무를 마친 뒤 별다른 역할이 없다가, 1904년 행정제도 개편에 따라 군기창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조선시대의 화기도감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 말에는 화통도감이 있었습니다.
1377년(우왕 3년)에 최무선의 건의로 설치된 화약, 화기 제조 담당 임시 관청입니다.

당시 왜구가 창궐하던 시기라 최무선이 중국 상인 이원에게서 화약 제조법을 배워와 왜구를 물리치려면 화약무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해 세운 것입니다.

당시 화통도감은 대장군포, 삼장군포, 신포, 화통, 화전, 철령전, 주화, 촉천화 등 18~20종에 가까운 화기를 개발해서 제조했다고 합니다.
화통도감에서 만든 총포를 통해 1380년 진포대첩과 1383년 관음포해전 등에서 왜구 격퇴에 큰 위력을 발휘했고, 1389년(창왕 때)에 폐지되었습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시대가 열리면서 화통도감이라는 이름은 사라졌지만, 조선초에 군기감과 군기시에서 무기제조를 총괄했습니다.
활, 화살 같은 냉병기뿐만 아니라 화약, 화포의 생산도 군기감이 맡았고, 기술자(공장)가 수백 명 소속된 큰 관청이었다고 합니다.

1401년(태종 1년),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을 등용하여 군기주부로 삼고 화기 제조를 본격화했고, 태종 4년에는 군기감별군, 화통군 증설, 태종 9년에는 화차(다연장 로켓무기) 제작 등으로 화약무기 기술이 크게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일본이 사용하던 조총은 조선 입장에서는 큰 충격을 받았고, 이후 조총청과 화기도감이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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