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옆, 덕수궁길 옆 서울시립미술관 가는 길은 1880~90년대 근대화로 가는 시기에 역사의 중심지가 된 곳입니다.
서울시립미술관이 있는 덕수궁길과 정동길은 조선 초기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정릉이 있던 곳이라 정동이란 이름을 가졌는데요.
태종이 현재의 정릉으로 이전한 이후 1880년대 이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오른 후 덕수궁을 정궁으로 사용하면서 역사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외국인 선교사들의 삶의 터전이 되었고, 각국의 대사관과 영사관이 들어사면서 정치와 외교의 중심지가 된 것입니다.
서울시립미술관 역시 정동의 역사와 함께 하고 있어 근대화 과정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이죠.
1886년 정부에서 세운 근대식 교육기관이었던 육영공원 터
1884년 박동에 개설되었다가 1891년 이곳에 있던 육영공원과 자리를 바꾸면서 문을 연 독일영사관 터
1896년 우리나라의 최초의 민간신문으로 창간했던 독립신문사 터
서울시립미술관 자리에 있던 근대화 시기의 기관들입니다.

서울시립미술관 입구
최정화 작가의 '장미빛 인생'이라는 작품이 서울시립미술관 본관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11월 말일에 찾았는데 아직 단풍이 남아 있어 떠나가는 가을의 옷자락을 잡으며 잠시 단풍을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1. 육영공원 터
육영공원은 1886년(고종 23) 9월에 설립된 한국 최초의 근대적 명문귀족 공립학교입니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로 조선에 서양문물을 들어오면서 영어를 구사하는 지식인이 필요해서 생긴 학교입니다.
1883년 미국에 파견된 보빙사 일행(민영익 등)이 서구의 발달된 문명을 보고 돌아와, 이런 교육기관이 시급하다고 건의한 것이 계기가 되었고, 주한 미국공사관 무관 G.C. 포크의 알선으로 설립이 되었습니다.
주로 정부 고위 관리와 그 자제가 다니는 엘리트 양성 기관에 가까웠고, 영어와 수학, 역사, 지리 등 근대 교과와 서양식 교육 방식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서당과 성균관과는 성격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미국인 교사들이 직접 와서 가르쳤고, 훗날 한국 근대 교육의 상징적 출발점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육영공원은 1884년 승인을 받았으나 갑신정변으로 2년 뒤인 1886년 7월 미국인 교사 3명이 내한하고 같은 해 9월 23일 정식 개교했습니다.
이곳에서 공부한 인물들은 근대 문물과 국제 정세에 밝은 새로운 관료층을 형성했고, 이후 개화와 독립운동, 외교 분야 인재의 토양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분 제한과 운영비(당시 항구에서 받는 해관세로 운영) 유용, 정부 재정난 등으로 학교 운영은 점점 어려워져 1894년에 폐교되었고, 교육 기능은 한성외국어학교 등으로 통합되었습니다.
조선 정부가 주도적으로 서양식 공교육 체제를 실험했고, 외국 선교사와 협력해 근대 학교라는 모델을 제도권 안에 들여놓았으며, 이후 배재학당, 이화학당, 관립 외국어학교 등과 함께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 교육 제도의 씨앗이 되었다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1886년 9월 개교부터 1891년 박동(현 수송동)으로 이전할 때까지 서울시립미술관이 있는 서소문동 38번지에서 육영공원을 개교, 운영했던 것입니다.
이후 이 부지는 독일영사관에 넘어갔는데요.
육영공원이 이전한 박동의 독일영사관(옛 묄렌도르프 저택)과 자리를 맞교환한 것입니다.

2, 독일영사관 터
독일영사관은 독일 제국이 조선에 설치한 외교공관으로, 영사관은 자국민 보호, 통상과 치역 문제, 외교 협상 및 정보 수집 등 근대 외교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곳입니다.
조선은 1880년대 이후 서구 열강과 잇달아 조약을 체결하면서 각국 공사관과 영사관이 정동 일대로 몰려들었고, 이 때문에 이 일대를 공사관 거리라고 부르기도 했는데요.
당시 프랑스, 영국, 러시아, 미국 등과 더불어 독일이 정동과 서소문 일대에 외교공관을 두었습니다.
독일 역시 조선과 조약을 맺고 1884년 박동에 처음 영사관을 세웠다가, 1891년 육영공원과 맞교환하면서 서울시립미술관 자리에 잠시 있었습니다.
1902년에 독일영사관은 다시 상동(현 남창동)으로 이전, 이 자리에서의 독일 외교공관 시대를 마무리했습니다.
독일영사관이 떠난 자리는 잠시 궐밖 각사 등으로 사용하다가 1896년부터는 같은 공간 일부를 독립신문사가 사옥으로 사용합니다.

3. 독립신문사 터
독립신문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사이자, 최초의 한글 전용, 영문 병행 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던 곳입니다.
1896년 서재필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 인사들이 독립협회의 기관지로 창간했고, 한글판은 민중 계몽, 영문판은 외국 공관, 선교사, 외신을 대상으로 조선의 입장과 현실을 알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독립신문은 부패 관료를 비판하고 자주독립과 입헌군주제 주장, 근대 시민의식, 신문고 역할 등을 적극적으로 펼치며,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이고 혁신적인 매체였습니다.
필진에는 유길준, 윤치호, 이상재, 이승만, 주시경 등 개화 독립운동의 핵심 인물들이 참여했습니다.
독립신문은 1896년 4월 7일 창간, 1899년 12월 4일 폐간까지 약 3년 8개월간 발행됐습니다.
초기에는 주 3회(화목토) 격일간으로 시작했다가, 점차 발행 주기를 늘려 나갔습니다.
최초의 민간, 근대식 신문으로 관보 성격의 한성순보와 달리, 권력 밖 민간 지식인들이 만든 신문으로, 조선에서 ‘언론이 권력과 분리된 공적 비판 공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아울러 4면 가운데 3면을 순한글, 1면을 영문으로 구성해 양반층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도 읽을 수 있는 신문을 지향했습니다.
독립협회의 활동과 맞물려 내정개혁, 언론자유, 민권 신장 여론을 형성했으며, 이후 3.1 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언론 활동 등으로 이어지는 민족 언론의 계보에서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독립신문사가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지는 오랫동안 논쟁 거리였지만, 서울시 표석과 여러 연구를 종합하면,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부지(옛 독일영사관 터 안)에 사옥이 있었다는 설이 유력하며, 서울시도 그 근거로 표석을 설치해 두었습니다.
그 뒤 이 자리에는 일제가 경성재판소(1928)를 세우고, 해방 후에는 대법원 청사, 1990년대 대법원 서초 이전 후 리모델링을 거쳐 2002년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이 들어섰습니다.
현재 미술관 정원에 서 있는 ‘독립신문사 터’ 표석은, 이 공간이 한때 권력을 비판하고 민권을 주장하던 언론의 최전선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서울시립미술관은 1988년 옛 경희궁 터, 서울고등학교 건물을 개보수해 설립한 시립미술관이며, 2005년 옛 대법원 자리인 현재의 자리에 이전해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은 이곳의 서소문본관을 비롯해 남서울미술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북서울미술관, 백남준을 기억하는 집,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등을 운영하면서 서울 시민의 미술문화 진흥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만추의 서울시립미술관 가는 길 그리고 입장료와 주차장 등 관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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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미술관은 서울의 미술문화 확충을 위해 1988년 옛 경희궁 터에 있던 서울고등학교 건물을 개보수해 설립한 시립미술관입니다.경희궁 터에 있던 것을 2005년 옛 대법원 자리인 현재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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