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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농협 본사 농업박물관 앞, 4군 6진을 개척했던 계유정난의 희생자인 김종서 집터

by 일상행복 주식회사 2025.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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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초기 김종서(1383~1453)는 대표적인 문신이자 군사 지도자로, 여진세력을 압박하여 4군 6진을 개척했고,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벌인 계유정난에 수양대군에 의해 희생당한 인물입니다.

 

서대문역 앞, KN농협생명과 NH농협은행 본사 앞, 농업박물관 앞에는 김종서 집터가 있습니다.

당시 조선시대에는 김종서 집터 앞에 한양도성의 서대문인 돈의문(의를 두텁게 하는 문)이 있었는데요.

 

돈의문은 한양도성 건설 당시 8개 성문을 만들 때 같이 지어졌으나, 태종 13년(1413)에 풍수학생 최양선이 풍수적으로 돈의문의 자리가 좋지 않다고 하여 폐쇄되었고, 이후 경희궁 서쪽 언덕에 서전문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종 4년(1422)에 세종은 서전문을 헐고, 오늘날 신문로 언덕 위에 돈의문을 다시 세웠고, 새오 세운 문이라는 의미로 새문(돈의문 안쪽을 새문안이라 함)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숙종 37년(1711)에 낡아 다시 지었고,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전차궤도를 복선화 하면서 돈의문을 철거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한양도성의 4대문 중 숭례문, 흥인지문, 숙정문은 남아 있지만 돈의문만 사라진 상태입니다.

 

김종서는 고려 말인 1383년에 공주목에서 태어나 조선 초에 과거에 급제(1405)해 관료로 진출했고, 세종 대에 북방 방어와 개척의 핵심인물이 되었습니다.

함길도 도관찰사 재임기에는 두만강 방면의 6진을 개척하며 훗날 두만강을 축으로 하는 국경을 만든 공을 세웠습니다.

 

세종은 이런 김종서를 신임하면서 인사와 군사 현안을 폭넓게 맡겼고, 문종 때에는 고려사와 세종실록, 고려사절요 등의 편찬을 총괄하기도 했습니다.

행정과 군사 실무와 사료 편찬을 함께 견인한, 전형적인 학예겸비 관료의 면모를 보여 줍니다. 

 

 

하지만 문종이 죽고(1452), 단종이 즉위한 이후 정국은 급변합니다. 
수양대군(훗날 세조)이 실권을 노리며 권력을 확장하자, 김종서는 좌의정으로서 황보인 등과 함께 어린 임금 단종을 보필하며 왕권을 지키려 했습니다.


1453년 결국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으키며 한밤중 기습을 감행해 김종서 등 보좌 세력의 제거로 권력을 장악합니다. 
김종서는 그날 밤 피습으로 중상을 입고 희생되었고, 이 사건으로 수양대군이 조정 실권을 완전히 거머쥐게 되었습니다. 

김종서는 죽은 후 오랫동안 반역 혐의로 불우했으나, 영조 22년(1746)에 이르러 복관(추숭)되어 명예를 회복하게 되었는데요.
그의 생애는 국방과 개척, 사서 편찬에 빛나는 공과 정통성 수호를 둘러싼 권력 투쟁의 비극이 교차하는 조선 전기 정치사의 축약판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종서는 북방의 국경을 제도화 한 최고의 실무형 재상이자, 정권교체기의 권력 역학을 오판한 비극의 정치가였습니다.

역사에서 우리가 배운 것은 단종 편에 서서 죽임을 당했다 정도로 알지만, 실상은 그의 공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한반도의 북쪽 경계인 두만강 유역이 여진족의 땅이었지만, 여진과의 전투에서 가슴과 허벅지에 화살을 맞아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여진족을 몰아내며 6진을 개척해 나라의 국경선을 확정했습니다.

고려사를 저술한 역사학자였고, 문종의 신임을 받았으며  단종을 지키기 위해 헌신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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