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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여행

정독도서관 - 장원서 터, 성삼문 살던 곳, 중등교육 발상지

by 일상행복 주식회사 2025.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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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한옥마을에 위치한 정독도서관은 봄 벚꽃이 유명한 곳으로, 1976년 경기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하자 리모델링을 거쳐 1977년 정독도서관과 서울교육박물관으로 오픈한 곳입니다.

 

정독도서관의 1, 2동 건물과 구내식당인 소담정, 사료관 건물은 근대 벽돌건축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 2002년에 등록문화재 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아울러 정독도서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중등교육발상지였고, 김옥균 집터이자 조선시대 학자로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생을 마감한 사육신의 대표였던 성삼문이 살았던 곳이고, 조선시대 궁궐의 후원과 각기의 과수원을 관리하고 궁중과 여러 관아에 과일과 화초를 공급하던 장원서 터가 있습니다.

 

1977년 1월 개관한 정독도서관

 

경기고등학교 교사 3동(3층)을 그대로 리모델링해서 오픈했고, 운동장은 벚꽃과 등나무, 잔디광장이 있는 정원으로 꾸며 도서관 이용객들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휴식과 쉼이 있는 공간으로 꾸몄습니다.

 

군사정권 시절인 1981년에 국군보안사령부(국군방첩사령부) 부지 내에 있던 조선왕조의 친인척 사무기관이었던 종친부 건물이 정독도서관 앞마당에 강제로 이전되기도 했는데요.

2008년 국군기무사령부(현 국군방첩사령부 )가 과천으로 이전한 뒤 2013년 12월 종친부 건물인 경근당과 옥첩당이 정독도서관에서 기존의 종친부 터가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으로 이전, 복원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어보와 어진을 보관하던 관청,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
 

 

아울러 정독도서관에서는 경기고등학교 교사 중 하나를 리모델링해 1995년 서울교육사료관으로 개관했고, 2011년에 서울교육박물관으로 명칭을 변경했습니다,.

우리나라 교육의 발전 모습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교육제도, 교육과정, 교육 내용, 교육기관, 교육활동 등에 관한 유물과 사진 등 각종 자료를 시대별로 전시하고 있습니다.


서울 정독도서관 풍경 및 이용안내(주차장, 구내식당 소담정 등)

북촌 정독도서관 주차정보와 서울교육박물관 관람안내

 

정독도서관 입수에는 3개의 표지석이 나란히 있습니다.

 

중등교육발상지

성삼문 선생 살던 곳

장원서 터

 

먼저, 중등교육발상지

이 터는 중등교육의 발상지로 서기 1900냔 고종황제 칙령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의 관립중등학교로 건립된 경기고등학교가 있던 자리이다.

 

한국 근대 학교 발달은 조선 말기부터 이뤄졌는데요.

정독도서관 이전에 경기고등학교가 있었고, 그 경기고의 뿌리인 우리나라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인 관립중등학교가 있던 곳입니다.

 

정독도서관 자리는 갑신정변을 일으키며 갑신정변을 논의했던 김옥균과 서재필 등의 집이 있던 곳이라고 합니다.

3일 천하로 끝난 감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흉가로 방치되던 김옥균과 개화파들의 집은 쓰러져 헐리게 되었고, 1900년 한성중학교(경기중.고등학교 전신)가 설립되면서 학교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김옥균의 집터에서 만나는 개화의 꿈, 갑신정변 주역 김옥균의 생애

 

 

1899년 대한제국은 근대식 중등교육 체계를 공표했고, 1900년 10월 3일에 이곳 화동 언덕에 관립한성중학교(일명 관립중학교)를 개교시킴으로써 최초의 관립중등학교로 한국 중등교육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관립 한성중학교는 1906년 관립 한성고등학교로, 1911년 경성고등보통학교, 1921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1938년 경기공립중학교로 이름을 바꾸며 제도 변화와 식민지 교육정책의 영향을 겪었습니다. 

해방 후엔 경기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로 분리되었고, 1976년 경기고가 강남으로 이전한 것입니다.

 

성삼문선생 살던 곳

태종 18년(1418) 태어나서 사육신의 한 분으로 세조 2년(1456) 순절한 상삼문 선생이 살던 집이 이 부근(화종 23번지)에 있었다.

 

 

성삼문(1418–1456)은 세종 대에 두각을 나타낸 집현전 학자이자 관료로, 세조 즉위 뒤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했다가 처형된 ‘사육신’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호는 매죽헌, 충청도 홍성 출신입니다.
1438년 소과에 오르고, 1447년 중시 문과에 급제하여 본격적으로 조정에 진출했고, 집현전의 여러 직책을 거쳤습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당시 명나라의 음운학의 권위자인 한림학사 황찬이 귀양 와 있던 요동에 13번 왕래하며 훈민정음 창제에 공헌했다고 알려졌습니다

1453년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이 실권을 잡고, 1455년 즉위(세조)하자 성삼문은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등과 함께 단종 복위 계획을 준비했으나, 동참자 김질이 장인 정창손의 설득으로 거사를 고변하며 계획은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1456년 음력 6월, 성삼문은 끝내 처형되었습니다. 

성삼문은 고문과 심문 속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은 인물로 전해지며, 사육신과 함께 충절의 상징으로 기리고 있습니다.
그는 동작구 노량진 사육신공원(사육신묘)에 묻혀 있고, 사당(의절사)에서 매년 제향이 봉행되고 있습니다.

 

장원서 터

궁궐의 후원과 각지의 과수원을 관리하고, 궁중과 여러 관아에 과일과 화초 등을 보급하던 관아 터

 

 

장원서는 궁궐 정원의 조경과 화초 재배, 왕실과 종묘, 각 전각에 올리는 과일 조달, 관아와 군영, 내의원 등에 필요한 과일과 화훼 공급을 맡았던 조선시대 관청이었습니다. 

이곳은 궁궐과 가깝고 꽃의 동네란 의미로 화동이라 부를 정도로 장원서와 관계된 곳입니다.


내부에는 기능별 색 조직이 있었는데, 예컨대 생과색(배, 밤, 은행, 홍시 등 생과 공급), 건과색(곶감, 호두, 잣, 대추 등 건과 관리), 과원색(과수원 관리), 작미색(공납미, 곡물 관련), 공방색(기물 관리), 장무색(행사, 잡무) 등으로 구분해 운영했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장원서가 단순 공급을 넘어 품종 개량과 재배 확산 같은 연구소 성격도 가졌다는 것입니다. 
기록에는 제주 감귤의 남해안 이식 시도 등, 재배 지대 확장을 위한 노력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태봉(궁예) 때 식화부, 고려의 내원서로 이어지고, 조선 건국 초기에는 상림원, 동산색으로 불리다가 세조 12년(1466) ‘장원서’로 개칭되었습니다.
이후 조선 후기까지 기능과 관직 구성이 조금씩 바뀌고, 고종 19년(1882)에 폐지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제조 1인(종2품 겸임), 별제 3인(정·종6품 무록관), 장원 1인(정6품 유록관) 체계였고, 후대로 가면서 봉사가 신설되고 별제·장원 수가 조정되는 등 조직 슬림화가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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