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불 맹사성(1360~1438)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청백리의 표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요.
조선시대 관직 생활 동안 사익을 추구하지 않고 공정하고 청렴하게 직무를 수행한 모범적인 관리로 청백리로 선정된 분이었습니다.
청백리는 청렴결백한 관리의 줄임말로 절대로 부정부패와 권력형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관료(반대는 탐관오리)를 말합니다.
의정부에서는 이런 관료들에게 청백리라는 칭호를 내렸는데 대단한 큰 영예로 간주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청백리 칭호를 받은 사람은 200명 내외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불(古佛)이라는 호는 "등이 구부정하다 하여 스스로 지었다"는 말과 "불교식 제사를 지내며 아버지를 높여 부른 호칭에서 유래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종로구 가회동에는 조선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청백리 맹사성이 살았고, 숙종 때 황해도와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그의 후손 맹만택이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마을의 이름을 맹현이라 했고, 화동 1~7번지 정독도서관 뒤 언덕배기 일대를 맹감사 고개, 맹동산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맹사성 집터가 있는 언덕 위 건물
그의 집터는 현재 북촌전망대 카페이자 북촌동양문화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맹사성(1360~1438)은 충남 아산 출생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적 기반을 다졌습니다.
아산에는 가장 오래된 민간가옥으로 맹사성의 고택이 남아 있는데요.
맹사성 고택은 최영 장군이 살았던 집(1330년 최영 부친이 지은 집)으로 위화도 회군 이후 비어있던 집에 맹사성 일가가 전란을 피해 내여와 살았다고 합니다.
맹사성의 조부인 맹유는 최영 장군과 친구였고, 아버지 맹희도는 고려 충신 정몽주와 친구사이였다고 합니다.
아울러 고택, 사당, 구괴정 그리고 맹사성이 심었다는 은행나무단을 망라해 맹씨행단이라 부르고 있고, 현재에도 신창 맹씨 집성촌이 있습니다.
그리고 맹사성 묘는 경기도 광주시 영장산 자락, 일명 맹산에 있는데요.
죽은 후 그의 본가인 온양으로 가던 도중 상여에 바람이 불어 명정(죽은 자의 관직명을 적은 깃발)이 지금의 묘 자리에 떨어져 이곳에 묘를 썼고 신창 맹씨 후손들이 모여 살며 집성촌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근처에 그의 부인 묘가 있고, 특이한 점은 그가 생전에 타고 다니던 검은 소의 무덤 흑기총을 이곳에 묻었다고 합니다.
온양의 집 뒤에서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검은 소를 데려와 정성껏 길렀고, 이 소를 타고 피리를 불며 서울과 온양을 오갔는데요.
맹사성이 79세로 세상을 떠나자, 소는 사흘 동안 먹지 않고 울다 굶어 죽었다고 합니다.
(오마이뉴스 참고)
맹사성은 고려 말의 혼란기를 겪으며 성장했지만, 19세에 장원급제로 파주 군수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는데요.
태종과 세종 대에 걸쳐 중용되며 청백리 상징으로 통하며 우의정과 좌의정까지 올랐습니다.
다만 황희에 비해 관리들이나 정국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점에 있어서는 다소 부족해 신중한 스타일이었다고 합니다.
맹사성의 가장 큰 업적은 ‘청렴과 검소함’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재상으로 있으면서도 사치와 권세를 멀리하고, 벼슬살이로 얻은 재물을 개인적으로 축적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집은 언제나 소박했고, 평소 검소한 생활 태도로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세종은 그를 두고 “국가의 기둥이 될 만하다”라고 칭찬했으며, 후세 사람들은 그를 ‘맹백리’라 부르며 청백리의 전형으로 삼았습니다.

맹사성은 문신으로서 단순히 학문만 중시하지 않고, 실무 능력과 덕성을 함께 갖춘 인물을 중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이런 태도는 세종 대의 안정적인 국정 운영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더불어 백성들의 삶을 세심히 살펴, 억울한 일이 없도록 제도를 보완하고 법 집행에 공정을 기했습니다.
맹사성은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는데요.
우리 고유 음악인 향악에 지식과 관심이 많아 조선 초기 음악을 정리하는 등 스스로 악기를 만들어 연주하기도 했는데요.
한국 문학사상 최초의 연시조로 알려진 '강호사시가'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1438년(세종 20) 79세를 일기로 생을 마친 맹사성은 조선 초기 정치와 문화, 학문 발전에 크게 기여한 명재상으로 평가됩니다.
그의 삶은 권력이나 부귀보다 청렴과 덕성을 중시하는 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맹사성은 조선 건국 초기에 나라의 토대를 다지고 세종의 치세를 빛낸 큰 인물입니다.
그의 출생에서부터 정승에 이르기까지의 업적, 청백리로서의 삶, 그리고 인간적인 풍류까지 모두가 조화를 이룬 삶은 오늘날에도 귀감이 됩니다.
시대가 달라도 맹사성의 삶은 부패와 권력 남용이 빈번한 시대에 공직자의 올바른 자세를 보여줍니다.
그의 청렴함과 공정함, 백성을 위한 헌신은 오늘날에도 정치가와 관료들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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