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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3대 대첩, 행주산성의 행주대첩 이야기

일상행복 주식회사 2025. 5. 29. 03:00

오랜만에 임진왜란의 3대 대첩인 행주대첩을 이룩한 행주산성을 찾았습니다.

 

행주대첩은 조 선 선조 때인 1593년에 권율이 이끄는 조선군과 백성들이 행주산성에서 힘을 합쳐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싸움인데요.

진주 대첩, 한산도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첩 중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찾은 행주대첩 승전지, 행주산성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 행주산성 충장사와 대첩기념관

 

 

오늘은 행주산성 대첩기념관과 행주산성 산책로에 게시된 행주산성과 행주대첩 이야기를 모티브로 행주산성의 행주대첩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행주산성 대첩기념관에서 상영되고 있는 6분짜리 미디어파사드

 

칠전칠승 신호지세

- 굶주린 새벽의 호랑이와 같은 맹렬한 기세로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이기다

 

1593년 2월 12일, 새벽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12시간 진행된 행주산성에서의 왜군과의 전투.

7번 싸워서 7번 모두 이겨낸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의 역사를 이룬 이야기입니다.

 

 

행주대첩은 당시 조선 여러 지역에서 왜군에게 큰 피해를 입은 상황이었고, 수도권을 지키는 마지막 요새였던 행주산성에서 수적인 절대약세에도 불구하고 대승을 거두어 왜군에 대한 반격의 계기 마련했습니다.

 

이후 한양 탈환과 왜군 철수의 기반이 된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임진왜란은 1592년 5월 23일, 일본군이 부산포를 침략하여 시작된 7년의 전쟁을 말합니다.
일시 후퇴했다가 1597년 다시 침범하여 1598년 퇴각한 정유재란까지를 포함하고 있으며, 조일전쟁, 7년전쟁, 임진전쟁 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조선 왕실은 일본군이 침략한 15일 만에 개성, 평양, 의주까지 피난을 떠났고, 한양은 단 20일 만에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두 달 만에 한반도의 대부분을 점령했습니다.

 

일본군의 강한 기세에 곧 조선이 패망할 것처럼 보였지만,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과 의병의 활약으로 일본군의 진격은 주춤하게 되었습니다.

 

이듬해인 1593년 2월에는 평양성을 점령했던 일본군이 조선군과 명군의 반격을 받아 철수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군사를 이끌고 한양으로 내려왔습니다. 

 

이에 전라 순찰사였던 권율 장군은 이치전투와 독성산성 전투를 승리한 후, 한양의 일본군을 공격할 기회를 엿보기 위해 행주산성에 진을 쳤습니다.

일본군은 자신들을 추격하던 명군을 벽제관에서 크게 격파한 다음, 기세가 오른 상태에서 자신들을 공격할지도 모를 행주산성의 조선군까지 물리치려고 했습니다.

 

1593년 2월 12일

 

임진왜란의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부터 일본군의 총대장이었던 우키다 히데이에까지 일본 전국시대의 이름난 일곱 무장이 합세한 3만명의 병력이 행주산성으로 쳐들어 왔습니다.


당시 행주산성에 있던 조선군대와 승병과 의병을 모두 포함하여 기껏 2,700여명으로 방어해야 하는 말도 안되는 전쟁이 시작된 곳이 바로 행주산성이었던 것입니다.

 

이때 조경 장군은 권율 장군과 함께 행주대첩에 참여한 인물로 행주산성을 발견해 집결시키게 한 인물인데요.


행주산성에 왔을 때 산성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엉망이라서 방어용 산성을 구축하자고 했으나, 규모가 작은 행주산성에 왜군이 쳐들어 오지 않을 것이라 예상한 권율 장군은 군사들의 힘을 빼지 말고 쉬게 했습니다.

 


그러나 조경은 권율이 외출한 사이에 군사들을 시켜 새벽에 이중으로 목책을 쌓았는데 결론적으로 행주대첩에서 신의 한수로 작용했습니다.

 

일본군은 3일 후 쳐들어 왔고, 목책을 불사르기 위해 화공을 펼쳤습니다.


조선군 부대장 조경은 이중으로 쌓은 목책에 한 가지 명령을 내립니다.
"목책에 진흙을 발라라!"

 

결국 일본군은 행주산성을 점령하지도, 불을 지르지도 못하게 된 것입니다.
행주대첩 이후 권율은 조경을 칭찬했고, 조정에 알려 선무공신 3등에 책봉됐다고 합니다.

 

아울러 조선의 군대는 당대 최신 무기인 망암 변이중 선생의 화차와 귀신 폭탄, 비격진천뢰로 적들을 격파하며 승승장구합니다.


서양보다 350년이나 앞서 만들어진 로켓화포인 신기전은 귀신 붙은 화살이란 별명을 얻었고, 작은 화살인 편전은 갑옷까지 뚫는 강력한 무기였고, 전자총통에 200여개의 조란탄을 넣어 발사한 것 등이 큰 힘을 발휘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막아도 줄지 않고 몰려드는 적군들을 막아내던 조선군들이 지쳐갑니다.

7차례 공격으로 목책이 무너지고 가지고 있던 무기가 없어 흙과 돌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권율 장군은 목숨을 다해서 지키라며 전장에서 전두지휘하며 병사들을 독려합니다.

 

행주대첩을 이끈 권율장군(1537~1599)은 영의정 권철의 막내로 태어나 늦은 나이인 46세(1582년)에 문과에 급제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광주목사로 임명되었고, 임진왜란 중 전주성을 점령하여 호남지방을 확보하려는 왜군을 이치고개에서 물리쳤습니다.

이치대첩은 당시 거듭 패배하던 조선군이 처음으로 육지에서 크게 승리한 전투였습니다.

 

 

이 승리로 전라도 순찰사가 되었고, 이후 1만명의 군사를 모아 경기도 오산 독산성 전투에서도 승리하여 왜군의 호남, 호서지방 진출을 막았습니다,

이후 한양을 되찾기 위해 행주산성에 배수의 진을 친 후 왜군과 치열한 격전을 치르게 된 것입니다.

 

행주대첩을 승리로 장식한 후 권율은 도원수가 되어 전 군을 지휘하게 되었답니다.  

 

권율 도원수는 임진왜란이 끝난 1599년 63세에 관직에서 물러났고, 그해에 사망했습니다.

선조는 권율을 영의정에 추증, 1604년에 이순신, 원균과 함께 장수의 최고 영예인 선무공신 1등에 책봉되었고 권율장군에게 충장공의 시호를 내렸습니다.

 

이때, 당시 79세였던 정걸 장군이 수 만개의 화살과 지원병들을 데리고 도착했습니다.
배에 가득 실은 화살이 도착하면서 전세는 다시 조선군에게 다가왔습니다.

 

정걸 장군은 조선전기 무신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과 함께 옥포해전, 한산도대첩, 부산포해전 등에 참가해 많은 공을 세웠고, 행주대첩에서도 거의 떨어져가는 화살을 조달하는 구원병으로 나타나 큰 공을 세웠습니다.

 

1595년 관직에서 물러난 뒤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 여름에 83살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퇴각하는 일본군들을 무찌르며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1593년 2월 12일, 새벽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12시간 동안 치른 7번의 전투 중 7번 모두를 이긴 대역사였습니다.

행주대첩은 훗날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대첩과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행주대첩의 승리요인은 무엇이었을까요?

 

민관군은 물론 부녀자들까지 혼연일체 되어 나라를 구한다는 목숨 건 전투였고, 권율 도원수의 전략과 전술, 과학적으로 사용된 최신 무기사용, 강과 절벽으로 만들어진 행주산성의 지리적인 조건 등이 그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울러 행주대첩을 이끈 권율 장군 뿐만 아니라 군사들을 쉬게 하라는 권율 장군의 명을 어기고 목책을 설치하여 대업을 이루도록 한 조경장군, 79세의 나이에 군사를 이끌며 행주산성을 도우러 온 정걸 장군 등 숨은 주역들까지 알게 된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