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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구리 동구릉, 조선 18대 임금인 현종과 명성왕후의 숭릉과 동구릉 연지

by 일상행복 주식회사 2026.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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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 동구릉은 서울 동쪽에 있는 9기의 조선왕릉(15개의 봉분)이라는 의미로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가 이곳에 잠들어 있어 조선왕릉이 제일 많은 곳입니다.
아울러 원이나 묘가 아닌 왕릉만 있는 곳이 바로 동구릉이기도 합니다.

1408년(태종 8)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건원릉이 처음 조성되었고, 이후 문종의 현릉, 선조의 목릉, 현종의 숭릉, 장렬왕후의 휘릉, 단의왕후의 혜릉, 영조의 원릉, 헌종의 경릉이 차례로 조성되었습니다.
당시 능의 개수에 따라 동오릉, 동칠릉으로 불리다가, 1855년(철종 6) 추촌 문조(효령세자)의 수릉이  이곳에 옮겨지면서 동구릉이 완성되었습니다.

 

[조선왕릉] 조선왕릉이 가장 많은 구리 동구릉(입장료 및 주차장 정보)

 

 

오늘은 조선 18대 임금인 현종과 그의 계비인 명성왕후가 잠들어 있는 동구릉 숭릉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울러 숭릉에 유일하게 있는 숭릉 연지 풍경도 담았습니다.

 

숭릉은  조선 20대 임금인 경종의 단의왕후의 무덤인 혜릉 옆에 있으며, 동구릉에서 가장 서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조선 18대 임금인 현종과 명성왕후의 쌍릉입니다.

 

 

 

먼저 숭릉 아래쪽에 있는 연지로 이동했습니다.

 

숭릉 연지는 1674년(숙종 1) 왕과 왕후의 능을 만들 때의 담당기관인 산릉도감에서 조성한 인공연못으로 풍수지리 사상의 영향을 받아 조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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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모난 형태에 거운데 둥근 섬이 있는 방지원도형으로 네모는 땅을, 둥근 섬은 하늘을 상징하는 우주관과 자연관이 담겨있다고 합니다.

동구릉 내 유일하게 숭릉에만 연지가 있는데, 이는 동구릉 내에 형성된 3개의 물길(건원릉과 휘릉 사이, 원릉과 경릉 사이, 숭릉과 혜릉 사이)을 관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숭릉 연지는 처음 조성된 숙종 대부터 영조, 정조, 고종 대까지 연못 둘레에 돌 축대를 정비하고 연꽃 종자를 능관으로 하여금 심고 기르게 했다고 하는데요.
근대화 과정을 거치며 물이 드나드는 입, 출수구 등 제방시설이 없어지고 변형되었고, 2017년까지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숭릉 연지의 면적은 4,941㎡이고, 수심은 약 50cm라고 합니다.

 

연지에는 왜가리와 백색의 백로 여러 마리가 한가로이 먹이를 채집하고 있더군요.

 

작은 연지에서만 7~8마리가 있었습니다.

 

연지를 벗어나 숭릉으로 이동합니다.

울창한 산책로는 여름이라도 햇빛이 가려져 걷기에 좋은 길로 변해 있습니다.

 

숭릉 가는 길

숭릉으로 향하는 길은 동구릉 내에서도 조용하고 아늑한 산책로로 꼽힙니다.

 

동구릉 숭릉 홍살문

 

홍살문은 능이나 원, 묘, 궁 등 정면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나무 문으로, 지붕 없이 화살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웠고, 그 중간에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습니다.

홍살문이 있다는 것은 이곳이 신성한 곳이니 격식이나 예절을 갖추라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현종(1641~1674, 재위 1659~1674)은 효종과 인선왕후의 아들로, 효종이  봉림대군 시절에 청나라에 볼모로 심양에 있을 때 출생해 역대 조선 임금 중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인물입니다.
재위 기간 동안 군사력 강화에 힘쓰고, 호남에서 대동법을 실시하여 농업을 발전시키고 두 차례 청나라 침략으로부터 국가 체제를 회복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효종에 이어 현종이 즉위하면서 시작된 예송논쟁으로 재위 15년 동안 대부분을 예론을 둘러싼 정쟁 속에서 지낸 왕입니다.

 

보통 왕릉 왼쪽에는 수라청이, 오른쪽엔 수복방이 있는데, 숭릉에는 오른쪽 수복방만 복원되어 있습니다.

수라청은 재실에서 준비한 제례음식을 데우고 진설하는 곳이고, 수복방은 능원을 지키는 사람이 머무는 공간입니다.

 

 

명성왕후 심씨(1642~1683)는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딸로 1651년(효종 2) 왕세자빈이 되었고, 현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습니다.

숙종의 어머니이기도 하며, 조선 왕들 중 후궁이 하나도 없었던 현종의 유일한 왕비였습니다.


며느리 인경왕후가 사망하자 신하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7개월 만에 계비 인현왕후를 맞아들였고, 당시 숙종의 은총을 받던 궁녀 장씨(희빈 장씨)를 경계하여 궁궐 밖으로 내보내는 등 대범한 성격의 여걸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숙종이 천연두에 갈려 사경을 헤매자 명성왕후는 무속인의 말을 믿고 아들의 쾌유를 빌며 한겨울에 얇은 옷만 입고 무속 치성을 드렸다고 합니다. 
결국 아들은 기적적으로 살아났으나, 명성왕후는 지독한 독감에 걸려 41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게 됩니다. 
자식을 위해 목숨을 바친 강인한 어머니였습니다.

 

조선 18대 임금인 현종과 명성왕후의 쌍릉

 

 

1673년 효종(1619~1659, 재위 1649~1659) 영릉을 구리 동구릉에서 여주 영릉과 영릉으로 천릉했고, 1674년 효종의 비 인선왕후(1618~1674) 영릉을 여주에 조성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674년 현종이 승하하자 명성왕후는 경제적인 부담이 커지자 묻어둔 효종 영릉의 돌거리 중 상돌, 장명등, 석인상 등 일부 손상된 부분은 고쳐서 다시 사용했습니다.

이는 조선왕릉 중 돌거리 재사용의 첫 사례라고 합니다.

 

1674년 현종 숭릉 조영 당시 명성왕후의 명으로 왼쪽을 비워 두는 허좌의 자리로 능지를 마련해 두었고, 명성왕후가 1683년 10월 승하하자 1684년 4월에 안장했습니다.

 

숭릉의 정자각(보물)

 

정자각은 제향을 올릴 때 왕의 신주를 모시던 곳으로, 위에서 봤을 때 丁자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제향음식을 차려놓는 정전과 제례를 올리는 배위청이 합쳐진 전각입니다.

 

숭릉 정자각은 1608년에 세워진 선조와 의인왕후, 인목왕후의 목릉 정자각과 1408년에 세워진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의 정자각함께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숭릉 정자각은 8칸 규모에 팔작지붕을 올린 17세기 정자각의 유일한 예라고 합니다.

 

숭릉 정자각에서 바라본 진입로 모습

 

숭릉 정자각 제향공간

 

숭릉의 기신제는 매년 9월 17일입니다.

 

높은 언덕에 위치한 숭릉

 

숭릉의 비각

 

숭릉 비문

 

왕릉의 비각에는 왕과 왕비의 생애, 시호, 업적, 능의 조성 기록 등이 새겨진 비문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대부분 한문으로 기록되었으며, 조선 왕실의 권위와 유교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입니다.

 

 

당쟁과 대기근이라는 모진 풍파 속에서도 서로만을 의지하며 조선을 이끌었던 현종과 명성왕후. 
자식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진 어머니의 사랑과, 평생 한 여인만을 사랑했던 왕의 순애보가 깃든 곳이 바로 구리 동구릉의 '숭릉'입니다.

 

 

동구릉 숭릉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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